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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Beuys - scultures, vitrines, objects, drawings

Seoul  

Joseph Beuys scultures, vitrines, objects, drawings

October 24 – November 19, 1995

Introduction

요셉 보이스를 이해하는 일은 곧 예술과 사회, 예술과 삶 나아가 정신과 물질 사이를 상호 소통하며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통일체로 완성하려 했던 그의 깊은 열망과 혁명적 예술관을 이해하는 길이다. 보이스는 예술의 역할이 단지 예술이라는 제한된 영역 속에서 물질화된 어떤 대상을 생산해내는 일이 아니고 거대한 사회구조의 짜임과 흐름속에서 보다 인간적인 삶을 이루기 위한 각 구성원들간의 상호소통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 사이를 넘나들었던 보이스 예술 사상의 중심은 자유, 평등, 박애에 입각한 휴머니즘의 실현에 있었으며 실제로 그는 자신의 예술적 생애를 통해 이러한 개념을 온몸으로 실천하려했던 이상적 행동주의자 였다고 말할 수 있다.

보이스에게 있어서 물질화된 설치 조각, 오브제, 드로잉, 멀티플등은 그 자체가 완성된 하나의 예술품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사상과 철학들을 풀어내기 위해 도구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던 특정의 매체들인 펠트천이라든가 지방 덩어리, 구리, 짐승의 피, 등은 그에게 삶과 죽음, 생명의 순환 및 遍在性, 따뜻함, 상처의 치유, 변화를 지속하는 형태, 에너지의 흐름 등 그의 예술적 사고를 형성하는 기본 개념들을 상징하기 위한 모티브의 역할을 하였으며 그는 이러한 매체들을 하나의 화두처럼 자신의 예술 문맥 속에 던져놓고 언제나 거기에서부터 개념의 발전과 소통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방식을 취하였다. 즉 보이스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박제화된 미술작품의 존재가 아니라 어떤 물질적 작품의 설정을 계기로 유발되는 보다 깊은 사고의 발전과 그 의미에 대한 관객과의 소통이었다. 그리고 보이스는 이것이 형성하는 사회 구성원들간의 보이지 않는 유기적인 상호 흐름을 통한 조화로운 총체적 사회에의 도달 과정이 궁극적으로 진정한 예술품이 되는 이상적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역사라는 것도 시간의 흐름속에서 어떤 거대한 질서를 향해 끓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 보이스가 이처럼 예술을 보다 광범위하게 범인류학적 차원에서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 과학, 인문학 등의 분야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더불어 아마도 일찍이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개인의 존재의 문제에 대해, 나아가 모든 생명의 가치에 대해 깊이 눈뜰 수 있었던 개인의 소중한 체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믿어진다. 보이스는 원래 소아과 의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2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독일 공군에 징집되어 복무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맸을 때, 버터와 펠트천으로 그를 감싸며 살려낸 타타르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이때의 체험이 그 후 그의 예술 활동을 이끌어간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따뜻한 에너지의 끊임없는 흐름을 통한 세상의 병리에 대한 치유라는 개념형성을 가능케 한 것이다. 뒤셀도르프 미술학교 시절 보이스는 작품 제작에 있어서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두드러진 학생이었으나, 이미 그때부터 그의 관심은 예술 행위를 통해 보다 포괄적으로 문화, 역사, 사회 구조의 문맥을 관통하는데 있었다. 이처럼 삶 전반의 모든 영역에 걸친 보이스의 관심은 개념적 설치조각, 드로잉 멀티플 작업 뿐 아니라 다양한 행위예술 작업으로 연결되었는데 이는 예술 작품을 ‘진보를 향해 언제나 변형을 계속하고 있는 상태’로 인식한 작가가 행위극(Actions)이라는 비정형적 예술작품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에너지 흐름의 형태로 사회속에 침투시키려한 혁명적 예술관의 당위적이고 극명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녹색당에 가입했던 일이라든가 동물에 대한 애정과 경의, 정치인들과의 토론을 통해 사회의식을 구현하려 했던 일 등은 모두 휴머니즘에 입각한 삶에 대한 긍정과 인류에 해한 박애정신 등을 사회속에 적극 퍼뜨림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정신의 에너지가 타인들에게 전도되고 거대한 유기적 흐름을 형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것이 거대한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조화로운 세상을 정립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리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그의 확장된 예술행위들로 이해된다.

그는 예술은 곧 삶이며 도든 이는 예술가라고 정의 하였다. 이것은 예술지상주의자가 주장하는 유미론은 결코 아니며 모든 이가 예술의 영역에 뛰어들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보이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순환’ 또는 ‘흐름’으로 그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이 소통 또는 순환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즉 육체적으로는 우리 신체 내부에서의 기능이 순환적으로 이루어져야 생명의 유지가 가능하듯이 사회적으로도 각 영역간의 상호 소통, 순환이 가능해야 그 존립이 가능하며, 이처럼 유기적으로 얽힌 모든 관계가 서로 그 존재의 가치가 존중되면 공존이 가능할 때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보이스의 생각으로 예술가의 역할을 각 구성원간의 건강한 관계를 촉진시키는 매개자로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을 통해 예술은 곧 삶이라는 보이스의 주장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모든 이가 예술가일 수 있다는 의미는 문맥속에서 사회의 각 구성원이 자신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 건전한 노력을 통해 이루어내는 어떤 결과물들이 그러한 사외의 커다란 흐름속 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보다 진보된 상태의 사회로 향하는 것이라면 바로 그것이 모든 조화로운 흐름을 촉진한다는 보이스적 예술의 정의와 일치하게 되고 여기에서 모든 이는 예술가라는 표현이 논리적 정당성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통해 현대예술은 곧 경제이며 자본이라고 표현했던 보이스의 견해도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이다. 보이스가 예술을 곧 자본이라 주장했던 것은 현대의 자본주의 유통체계 속에서 미술작품도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상품으로서 그 구조에 편입된다는 협의적 이해를 벗어나 자본이 유통의 구조를 통해서만 가치가 확인될 수 있듯이 예술도 위에 언급한 그러한 흐름 즉 유통 자체이어야 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또한 보이스의 작품에는 많은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등장하지만 그의 레디메이드는 20세기 현대 미술의 지평을 확장한 또 다른 중요 작가인 마르셀 뒤샹의 그것과는 전혀 상반된 입장에서 사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뒤샹이 예술의 통념에 대한 반기 또는 냉소로써 즉 통상적으로 이해되어온 예술(Art)에 대한 反개념으로서 레디메이드를 현대미술의 문맥속에 던진 것이라면, 보이스의 레디메이드는 예술과 反예술을 모두 포용하는 메타적 예술 언어이다. 즉 보이스의 예술가적 열정은 곧 삶 자체에 대한 경외감과 긍정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스의 레디메이드들은 모두 그에게 소중하고도 복합적인 의미와 역사를 가지므로 그의 예술 언어로서는 뿌리 깊은 당위성을 보유하는 물체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물체들은 보이스가 궁극적으로 실현하려는 거대한 사회 조각으로 나아가는 흐름의 형성을 위한 하나의 정신적 모티브로 작용 하는 것이기에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물질주의 시대에 사회와 집단의 병리적 행동 패턴을 치유하고 궁극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비물질적 사회조각, 사회예술의 실현이라는 진정한 진화를 위해 보이스는 이러한 매개물들을 보다 진보된 사고를 위한 영혼의 촉발제로 사용하고 작가 자신은 바로 그러한 영혼의 흐름을 다스리는 주술사(shaman)가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현대 미술의 개념을 전복시킨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을 뛰어넘으며 20세기 이후의 예술과 인류의 미래를 통찰한 그의 혁명적 사고와 모든것을 포용했던 요셉 보이스의 작가적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존재 한다고 믿어진다.

이번 국제화랑에서 마련되는 요셉 보이스 작품전은 그의 사망 1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지극히 독일적인 문화의 맥락 속에서 형성된 그의 예술이지만 우리는 그의 생명의 근원에 대한 깊은 관심, 인류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숭배, 삶 자체를 거대한 질서의 구현을 궁극적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려했던 이상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 사고가 사실은 동양의 정신에도 깊이 맞닿아 있었던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보이스의 작품들은 작가 개인의 사고나 체험에 매우 깊이 관련하고 있는 까닭에 그것들이 작가 자신의 존재와 서로 상응할 때 에 그 의미가 아주 팽팽한 것이었다면 이제 보이스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금 그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의 가치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긍정과 조화로운 세상을 향하여 철저히 예술을 삶으로 살다간 그의 예술 생애가 아직도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일깨워주는 강한 힘으로 작용함으로써 역사의 진화를 통한 그의 거대한 사회 조각이 지금도 형성되어 가는 과정임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